
평범한 도시의 풍경을 떠올려본다. 붐비는 도로와 그 위를 지나는 사람들, 여기에는 거리와 골목을 채우는 상점이 빠질 수 없다. 작가 김누리는 ‘상점’을 통해 도시를 바라본다. 그가 사는 전주 곳곳의 상점들은 네모반듯한 나무 위에서 새로운 색깔로 칠해진다. 공구거리의 낡은 가게부터 오래된 쌀집, 얼마 전 사라진 로또가게, 단골 식당까지. 익숙한 상점을 통해 우리는 도시의 어떤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김누리 작가
이야기가 모여야만 그릴 수 있다
작가가 그리는 상점은 먼저 외관에서부터 그의 호기심을 끌어야한다. 호기심이 생긴 가게는 여러 번 방문해 오랫동안 관찰하고 들여다본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의 주변을 맴돌며 들여다보는 일과 비슷하다. 주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 개인적으로 수집한 정보,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것들까지 이야기가 모이면 작업을 시작한다. 그 준비 과정이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 걸리기도 한다. 마음 안에서 이야기가 충분히 무르익어야 하나의 상점이 그림이 되는 것이다. 그의 상점 시리즈는 〈단골가게〉라는 제목으로 시작해 〈상점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변화했다. 사람뿐 아니라 상점에도 저마다의 얼굴이 있다는 생각에 상점의 초상화를 남긴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 작업들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 도시를 기록하는 역할을 함께한다.
“언젠가 공구거리를 지나다 ‘협신기계’를 발견하고 저곳을 무조건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며칠 동안 서성이며 염탐을 했죠. 사장님께서 정말 무섭게 생기셨거든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조심스레 말을 걸었더니, 여기가 50년이 넘은 가게인데 이 건물이 어떤 역사를 가졌고, 살면서 별별 일을 다 겪으셨다고 이야기를 풀어주시는 거예요. 전시를 마치고 협신기계 그림으로 만든 스티커를 선물해드렸더니 엄청 좋아하셨죠. ‘평생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 온 이분들은 누가 상을 주지?’ 제 안에 이런 질문이 늘 있었는데 그걸 문화예술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순간들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 도시가 사라지지 않도록 더 열심히 찾고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그 기록으로부터 사람들이 잊고 있던 시절을 떠올리거나, 무심코 지나쳤던 거리를 따스하게 바라보기를. 그것이 다시 자영업자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순환의 관계를 만들고 싶다. 그 바람 때문인지, 작품 속 상점들은 하나같이 생기 있고 화사한 색감을 갖고 있다. 빛바랜 간판과 낡은 건물들도 그림 속에선 선명해진다. 작가는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기보다는 처음 상점이 세워졌을 때의 모습을 복원하고, 그 위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한다. 무채색의 상점은 덕분에 따스한 색깔로 기억된다.


공구거리를 지나다 발견한 '협신기계'. 50년 넘은 가게 역사, 사장님이 해주시는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림을 완성했다.
하나의 상점은 한 명의 사람과 같다
그가 상점에 주목하게 된 이유에는 유년시절의 기억이 함께한다. 어릴 적 옷가게를 하는 엄마의 품에서 자란 작가는 학교가 끝나면 수많은 가게들을 지나 엄마의 가게로 향했다. 평생을 자영업에 몸담았던 엄마를 바라보며, 그에게 하나의 가게는 한 명의 사람으로 다가왔다. 늘 상점과 닿아있었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금속공예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입시 미술 강사로 10년 가까이 일했다. 미술이 좋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정해진 대로 가르치고 찍어내듯 그리는 입시 미술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때 뉴욕에 있는 친구의 권유로 무작정 뉴욕으로 향해 해외 살이를 하기도 했다.
여러 우여곡절을 지나, 고향인 전주로 돌아온 그는 부모님 집의 방 한 칸에서 사부작사부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료를 정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자신과 잘 맞는 재료를 찾아 하나하나 실험해본 끝에 아크릴 물감을 만났다. 캔버스는 나무가 대신했다. 우연히 나무 판넬 위에 그려본 상점은 나뭇결을 따라 물감이 스미는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자신만의 상점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나중에는 남부시장 한쪽에 저만의 첫 작업실을 얻었어요. 거기서 밤을 새며 작업을 했죠. 그때 막 청년몰이 생겨서 저와 비슷한 나이의 청년들이 가게를 열었거든요. 그 가게들을 다 찾아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죠. 막상 작업한 그림을 전시할 곳이 없어서 가게마다 그림을 걸어달라고 했어요. 식당, 카페, 공방마다 제 그림이 걸렸죠. 그런데 그 작품들을 통해 또 전시 기회가 생기더라고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전시 소식이 있으면 그때 인연을 맺은 가게들이 나서서 포스터를 붙여주고 응원을 주고받아요.”

김누리 작가의 작업실
어쩌면 작가는 ‘상점’을 통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도시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전주의 숨은 상점들을 기록하고 재밌는 상상들을 더하며 이제는 정말 스스로가 전주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곳을 떠나지 않고 오래도록 상점을 기록해 ‘전주’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되는 것이 작은 꿈이다.
“저는 구도심을 주로 찾아요. 제가 살아온 동네가 늘 오래된 곳들이었고, 오래된 골목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있거든요. 요즘 객사에 가면 마음이 아파요. 임대가 붙은 상가가 너무 많으니까요. 가게들이 오래 가지 못하고 자주 바뀌기도 하고요. 주변의 상가들이 빨리 활기를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여러 도시를 그리다 보면 도시마다 가진 색감이 다 다르거든요. 전주만이 가진 캐주얼한 색감이 있어요. 형태적으로는 평평하고 낮은 데서 오는 편안한 느낌이 있죠. 도시가 가진 그런 분위기를 앞으로도 잘 표현해 가고 싶어요.”
요즘 작가는 전주의 노포 맛집 중 하나인 백일홍 찐빵만두 가게를 그리고 있다. 평소 익숙하게 오가던 가게가 작품이 되니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작은 나무 조각에 촘촘히 채워질 그곳의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진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