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읽는 사람들  2026.9월호

도시에도 저마다의 향이 있다

조향사 박은지


박은지 조향사



한 배우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향수를 하나씩 산다고 한다. 해외여행을 가면 도착한 첫날 여행지에서 향수를 고르고, 여행하는 동안에는 그 향수만 뿌린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그 향을 맡으면 당시의 풍경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향을 통해 여행의 한때를 고스란히 기억하는 셈이다.


향은 이처럼 지나간 시간을 불러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매일 살아가는 도시도 향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전주에서 나고 자란 조향사 박은지 씨는 자신이 살아온 도시의 풍경을 향으로 옮긴다. 그가 운영하는 전주한옥마을 인근의 향수공방 ‘취향연못’에서는 익숙한 전주의 풍경을 향으로 만날 수 있다.



취향연못의 향수 '물결'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처음부터 조향을 했던 것은 아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꽃꽂이, 도예 등 여러 취미 수업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캔들 공예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오래 붙잡고 싶은 일을 찾았다. 회사를 다니며 객리단길에 작은 작업실을 차렸고, 취미로 시작한 캔들 공방은 자연스럽게 조향으로 이어졌다.


“원래 향수나 향을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냥 좋은 향이면 다 좋고 무난하게 좋아하는 정도였죠. 그런데 조향을 배우니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향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 안에 이야기도 담기고 내 감정도 담을 수 있어요. 향을 하나하나 쌓아서 완성하고 맡아보면 그때의 감정이나 경험이 순간적으로 떠오르기도 하고요. 그게 향이 하는 역할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매료됐어요.”


전주를 향으로 표현하게 된 계기는 로컬 창업 지원사업이었다. 전주를 주제로 한 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전주 사계절’이 탄생했고, 한옥마을, 덕진공원, 전주향교, 완산꽃동산을 각각 봄·여름·가을·겨울의 풍경으로 해석했다. 처음에는 지원사업을 위한 작업이었지만 전주를 조사하고 직접 장소를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졌다.




전주 사계절 시리즈




“솔직하게 전주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그때는 도시에 대한 관심도 크게 없었고요. 그런데 제품을 만들려면 전주에 어떤 장소가 있는지, 그곳은 어떤 계절에 어떤 모습인지 계속 찾아봐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내가 전주 토박이인데 이 정도도 관심이 없었구나’ 하고 어쩐지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제품을 만들고 하나씩 알아가면서 오히려 전주에 대한 애정이 생겼어요. 처음에는 상금을 받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마음이 동해버린 거죠.”


그의 향수는 장소의 이름을 그대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완산꽃동산은 꽃이 만개한 풍경보다 꽃망울이 터지기 직전의 초봄을, 덕진공원은 시원한 여름이 아니라 더운 여름밤 연못의 풀내음과 물내음을 담았다. 전주향교에서는 떨어진 은행잎 아래의 흙내음과 늦가을의 쓸쓸함을, 한옥마을에서는 눈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한옥의 정취를 떠올렸다. 전주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걷고 발견한 일상적 풍경을 향으로

조향사가 된 후 생긴 직업병은 의외로 '산책'이다. 원래도 산책을 좋아했지만 조향을 시작한 뒤부터 산책은 조금 특별해졌다. 새로운 전주를 만나는 마음으로 여행하듯 걷고, 걷다가 마주한 풍경과 공기, 바람에 자연스럽게 코를 기울인다. 그렇게 도시를 달리고, 뛰고, 서성이는 동안 수집한 감각들은 ‘산책길 시리즈’가 됐다. 전주천, 동고산성, 건지산 편백숲 등 유명 관광지는 아니지만 전주 토박이의 입장에서 소개하고 싶은 길들을 향으로 담았다.




전주 산책길 시리즈




전주를 넘어 인근 진안으로 시선을 넓히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오브제를 고민하던 중, 차를 타고 지나가다 마주한 마이산의 모습에 눈길이 머물렀다. 웅장하게 솟은 두 봉우리와 수려한 산세가 인상적이었다. 이후 탑사에 직접 올라 주변의 풍경을 살피며 마이산의 모습을 오브제에 담았고, 산의 형태를 형상화한 오브제 디퓨저를 만들었다.


장소를 향으로 옮기는 작업은 여러 문화예술 분야와의 협업으로도 이어졌다. 팔복예술공장, 전주역사박물관 등 지역문화공간에 향을 더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그중 가장 뜻깊었던 작업으로 국가무형유산 선자장 김동식 장인의 삶을 판소리와 다큐멘터리로 풀어낸 공연 <장인의 발걸음>을 꼽는다. 대나무 숲의 시원한 바람과 한지의 부드러운 결, 투명한 공기의 흐름을 담아 장인의 부채가 일으키는 바람을 표현한 향수는 공연의 굿즈가 되었다. 


“앞으로는 장소를 넘어 사람과 가게의 이야기도 향으로 담아보고 싶어요. 보통은 유명한 랜드마크들을 통해 도시를 기억하지만, 저는 제가 자주 가는 카페나 식당에서 전주스러운 분위기를 많이 느끼거든요. 결국 사람들이 모여서 이 지역을 만드는 거잖아요. 그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도 들어보고 싶어요. 그러면 또 재미있는 향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