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TED,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는 혁신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은 15분 남짓의 짧은 시간에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고 열광했다. 다소 추상적이고 복잡한 담론이 짧고 인상적인 말로 변환되어 대중의 일상 속으로 들어왔고, 우리는 그것을 ‘혁신’이라 불렀다. 20분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누군가sms 우주를 설명하고 죽음을 철학적으로 풀어냈으며, 기후 위기를 경고하고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나눴다. 그런데 2025년 현재, 이 ‘혁신’도 이제 ‘지나치게 길다’고 말한다. 디지털 시대에 사는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15분짜리 강연을 끝까지 보는 것조차 인내심을 요구받는 일로 여긴다.
‘생각할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숏폼 콘텐츠가 압도적인 시대, 우리가 가장 먼저 잃어버린 것은 ‘맥락’이다. 복잡한 현상은 배경과 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해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기후 위기를 진지하게 논의하려면 생태계의 변화와 에너지 시스템,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연결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은 길고, 복잡하며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든다. 결국 콘텐츠는 극단적인 날씨 클립이나 북극곰이 울고 있다는 감정적 이미지로 대체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감정은 느끼되, 문제의 구조는 이해하지 못한 채 공감만을 소비하게 된다.
‘TED’와 ‘세바시’도 이제 3분 이내의 숏폼 강연을 출시하고 있다. 마치 영화 예고편처럼 핵심만 남긴 콘텐츠다. 짧고 강렬하다. 하지만 내용의 무게는 사라지고 형식의 감각만 남았다. 한때 혁신적이었던 강연은 점점 인사이트 예능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단지 ‘콘텐츠의 숏폼화’가 아니다. ‘사고의 숏폼화’다. 뉴스는 트윗으로, 칼럼은 카드뉴스로, 학술 논문은 인포그래픽으로 대체된다. 지식은 시각화되고 단순화되며, 공감이라는 기준 아래 감정적으로 재조립된다. 그 결과 우리는 어느새 생각이 아닌 느낌만을 소비하게 됐다.
맥락 없는 콘텐츠가 쌓이고 있다
단지 ‘TED’와 ‘세바시’같은 강연뿐만 아니다. SNS를 통해 쉽게 접하는 각종 홍보영상도 마찬가지다. 넘쳐나는 병맛 지자체 홍보영상, 소위 ‘뇌절’ 영상이 그 예이다. 맥락이 없어도 자극적이고 웃음을 주는 영상들이다. 그리고 그런 콘셉트가 한번 유행하기 시작하자 트렌드라는 미명하에 카피가 시작됐다. 하지만 맥락 없는 카피가 거듭될수록 퀄리티는 떨어지고 피로도가 쌓인다. 단지 ‘MZ 감성’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런 영상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은 느끼게 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맥락을 제거한 콘텐츠는 이해력과 공감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보는 이가 내용을 파악하게 하는 것보다 얼마나 빠르게 반응할지만 따진다. 결국 영상은 ‘이해’가 아니라 ‘이미지 소비’가 된다. 과연 이런 ‘트렌드’가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생각할 시간’을 다시 확보해야 한다
생각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질문에는 맥락이 필요하다. 숏폼 콘텐츠가 모든 것을 장악한 지금, 우리가 정말 진짜 지켜야 할 것은 생각의 여백과 말의 길이, 그리고 감정이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아이디어는 요약될 수 있지만, 단순히 요약이 본질을 대체할 수는 없다. 도파민이 터지는 자극적인 영상보다는 맥락이 있는 공감이 필요하다. 감동은 짧을 수 있어도, 통찰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사고의 밀도를 잃어버릴 것이다. 넘쳐나는 ‘숏폼’의 시대, 우리가 필요한 것은 긴 문장을 읽고, 서사가 있는 영상을 보고, 끝까지 결론을 기다릴 줄 아는 태도다. 진짜 지켜내야 할 것은 바로 ‘생각할 시간’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이제는 조금, 느려져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