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전을 등지고 바라본 풍경
영주는 서로 다른 시대의 정신이 한 도시에 겹쳐 있다. 통일신라를 떠받친 불교와 조선을 이끈 성리학. 한반도를 대표했던 두 사상은 오늘날에도 부석사와 소수서원이라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조법종 교수와 함께하는 6월 역사기행은 경상북도 영주를 찾아 부석사에서 신라 화엄사상의 흔적을 만나고, 소수서원에서 조선 성리학의 뿌리를 따라 걸었다. 시대는 달랐으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정신은 공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산사와 서원을 잇는 길을 걸으며 옛 사람들의 사유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영주를 마주했다.
성리학을 꽃피운 선비들의 배움터
유교를 상징하는 은행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소수서원. 오래된 나무 아래를 지나 마주한 서원은 화려하기보다 단정하고 고요한 인상을 남긴다. 처음에는 왜 이곳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꼽히는지 선뜻 와닿지 않았다. 웅장한 건축이나 압도적인 규모로 시선을 사로잡는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천히 거닐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세상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선인들의 뜻이 먼저 다가온다.
소수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곳 가운데 하나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직접 이름을 내려 공인한 서원으로,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이면 제향이 이어진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원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소수서원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먼저 조선에서 성리학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교는 처음에는 국가를 운영하는 통치 이념이자 생활 윤리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죽음 이후를 설명하는 내세관이 없었기에 사회 전반으로 깊이 뿌리내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도덕적으로 살아서 무엇을 얻는가'에 대한 답이 부족했던 것. 유학자들은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며 사상 체계를 더욱 깊이 다듬기 시작했고, 그것이 성리학으로 발전한다. 성리학은 단순한 윤리를 넘어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철학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조선 사회의 정치와 교육, 학문의 근간이 됐다. 그 성리학을 배우고 연구하며 후학을 길러낸 곳이 바로 서원이었고 그 시작점에 소수서원이 있다. 영주와 안동 일대에 선비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배경에도 소수서원의 역할이 크다.

경렴정
소수서원의 시작은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순흥 출신의 고려시대 대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한 사당을 세운 것이 출발이다. 안향은 고려 후기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대학자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평가받는다. 주세붕이 부임했을 당시 지역 향교는 쇠락해 있었고, 안향과 그의 후손들이 공부했던 숙수사 역시 터만 남아 있었다. 안향의 흔적을 고향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낀 주세붕은 향교를 중건하고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만든다. 이 사당이 서원으로 발전했고, 숙수사 옛터에는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의 이름을 딴 '백운동서원'을 세운다.
이후 명종 때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서원을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한다. 서원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지면서 '소수서원'이라는 새 이름으로 사액이 내려졌다. 이후 소수서원은 지역 유생과 유학자들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는 대표적인 교육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소수(紹修)'라는 이름에는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최초의 사액서원이라는 상징성뿐 아니라, 조선 교육을 다시 세우려는 의지가 담긴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

강학당 편액
주세붕과 이황, 두 인물의 흔적을 소수서원 초입 죽계천의 한 바위에서 만났다. 이 바위에는 ‘白雲洞(백운동)’과 유교의 근본 사상을 뜻하는 ‘敬(경)’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각각 이황과 주세붕의 글씨로 전해진다. 이곳을 지나면 유생들이 학문을 익히던 강학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소수서원은 초기 서원이기 때문에 건물 배치도 비교적 자유로운 형태를 보인다. 보통의 서원이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대칭으로 두지만,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한다.
소수박물관에서는 이러한 서원의 배경을 더욱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소수서원의 교육 과정, 유생들의 생활, 제향 의례는 물론 서원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경제적 기반까지 전시하고 있다. 서원을 먼저 둘러보고 박물관을 찾으면 눈앞의 건축이 단순한 옛 건물이 아니라 조선 교육의 현장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당시 지역의 인재들이 모여들었던 모습을 떠올리면 오늘날의 지방 명문대와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느껴진다.
순흥면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금성대군이 이곳에 유배되었고, 단종 복위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역사 때문이다. 소수박물관에서는 당시의 기록을 바탕으로 영화 속 장면의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는 작은 전시도 열리고 있다.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면서 순흥 안씨는 큰 화를 입었고, 영남 사림 역시 오랜 탄압을 받았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세워진 소수서원을 영남 사림들의 문화적 부흥 운동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을 등지고 바라본 태백산맥은
꿈에 그리던 부석사를 드디어 눈앞에 두었으나 절집은 쉽게 모습을 내어주지 않았다. 주차장에서부터 한없는 오르막이 이어졌다… 조법종 교수는 "열반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수행이라 생각하며 걸어보라"고 했다. 은행나무 그늘이 이어져 더없이 아름다운 길이었지만, 경치가 눈에 들어올 새가 없었다. 길이 끝난듯하면 계단이 이어진다.
긴 수행 끝에 나타난 부석사는 한눈에 아름답기는 했으나 최순우 선생 저서의 이름값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사뭇 작은 규모에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무량수전 자체가 아름답다는 뜻만은 아니다. 말 그대로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 바라본 풍경이 아름답다는 뜻도 있다. 무량수전을 등지고 서면 태백산맥의 능선이 끝없이 펼쳐진다. 파란 하늘 아래 겹겹이 이어지는 산줄기는 마치 바다의 일렁임처럼 느껴진다.
소수서원이 조선의 성리학을 상징한다면, 부석사는 통일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이 절은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창건했다. 의상은 젊은 시절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향했지만, 원효는 해골물 일화로 깨달음을 얻어 신라로 돌아왔고, 의상만 홀로 당에서 화엄학을 익혔다. 귀국한 뒤에는 제자들과 함께 화엄십찰을 세우며 활동했는데, 부석사는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창건한 사찰이다.
의상대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원효와 비교해 의상을 보다 정치적인 승려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의상이 전한 화엄사상의 핵심인 '일즉다 다즉일', 즉 '하나가 곧 모두이고 모두가 곧 하나'라는 사상은 삼국통일 이후 신라 사회를 하나로 묶는 이론적 기반이 됐으며, 강력한 왕권을 뒷받침하는 논리로도 읽힌다는 것이다.

왕궁리 사리가 들어있는 석탑
오늘날 부석사는 국보 5점과 보물 4점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무량수전, 무량수전 앞 석등, 소조여래좌상, 조사당, 조사당벽화 등 하나같이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들이다. 특히 무량수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유산들이 가진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에 등재됐다.
부석사가 주목받은 이유 중 하나는 아름다운 가람배치도 있다. 자연과 어우러지며 사찰 입구과 천왕문, 범종각, 안양루, 무량수전까지 이어지는 구조는 부처의 세계로 가는 길을 이끄는 듯하다. 특이한 점은 불전 앞에 탑이 없다는 것. 일반적인 사찰에서는 불전 앞에 석등과 탑이 함께 놓이지만 무량수전 앞에는 석등만 있을 뿐 탑이 없다. 원래 있던 탑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보기에도 탑이 들어설 만한 자리가 마땅히 보이지 않는다.
무량수전은 지붕 밑의 간결한 공포가 특히 아름답다. 담백한 편액은 공민왕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내부에도 흥미로운 점이 있다. 대부분의 불전은 문을 열면 정면의 불상을 바로 마주하도록 되어 있지만, 무량수전은 불단이 서쪽에 놓여 있고 불상은 동쪽을 향한 채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정확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지만, 서방 극락이 아미타불이 동쪽 세상의 중생들을 굽어본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떠오른다.
사실 전북 사람이라면 부석사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것이 있다. 경내 석탑 앞 비석에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옮겨온 사리 다섯 과를 이곳에 봉안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 열여섯 과 가운데 다섯 과가 어찌하여 부석사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나머지 사리의 행방은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백제 왕도의 상징과도 같은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가 익산을 떠난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부석사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생각이 깊어진다.
글 류나윤 기자ㅣ 사진 김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