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대전에는 ‘노잼도시’라는 단어가 따라다닌다. 살기에는 좋지만 즐길 거리가 부족하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라는 책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될 정도로 '노잼도시'는 화제가 될 정도로 '노잼도시'는 대전의 도시브랜드(?)가 되어 갔다.
8월 10일, 마당 도시기행은 ‘노잼도시’라는 그곳, 대전을 찾았다.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안아야 했던 여름 한복판에서 만난 대전은 달라지고 있었다. 방치되어 있던 도시의 곳곳에서 옛이야기를 안고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대전은 이미 '노잼도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래된 도시, 특히 대도시들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 저마다의 서사가 있다. 대전의 경우, 서사의 중심은 철도다. 190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농경지가 대부분이었던 대전. 그러나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대전역이 들어서자 도시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번 기행에서 둘러본 소제동 철도관사촌, 공무원 관사촌 등이 생겨났다. 해방 이후에는 과학기술 연구단지와 카이스트, 충남대학교 등이 들어서며 원도심을 구성했다.
개발이 시작되며 대전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이들 오래된 동네들이 이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빈틈의 공간이 되어 대전을 바꾸고 있다. 기차역의 직원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 ’힙‘하게 바뀌었고, 대학로 사이 오래된 동네는 주민들과 청년들이 나서 새로운 옷을 입혀가고 있다. 공무원들이 살던 관사촌에는 예술이 덧입혀졌다. 번쩍거리고 화려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노잼도시'라는 도시브랜드를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관사 16호_아트벨트
대전의 오래된 빈틈 '소제동 철도관사마을'
이번 기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공간은 소제동이었다. 100퍼센트 민간의 참여로 이루어진 거의 전국 유일의 도시재생 사례이기 때문이다. 대전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주식회사 관사마을의 대표로 소제동 도시재생을 이끌고 있는 정태일 대표가 소제동의 구석구석을 안내해주었다.
소제동은 과거 '소제호'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던 자리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철도 건설이 시작되며 호수를 메우고 철도 종사자들을 위한 관사촌이 자리 잡았다. 광복 이후 시간이 지나며 거리는 점점 쇠퇴했고 지은 지 50년 넘은 건물들이 그대로 방치됐다. 전국의 철도관사촌 중 가장 큰 규모이며, 외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건축·역사적 가치가 매우 컸지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2017년 소제동의 골목을 되살리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서울 익선동을 '핫플'로 바꾼 것으로 유명한 익선다다와 글로우서울 등 여러 민간 기업이 소제동에 들어오면서부터다. 이들은 오래된 관사 건물을 카페와 식당으로 바꾸며 소제동 카페거리를 조성하며 젊은이들의 발길을 이끌었다.
주식회사 관사마을은 6년 정도 된 대전의 로컬 기업으로, 구 동양척식회사 대전 지점을 복원하여 만들어진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을 운영하는 등 지역 문화예술에 깊은 관여를 하고 있는 씨엔씨티에너지(충남도시가스)의 자회사다. 이들은 2017년 초기 프로젝트부터 지금까지 소제동 도시재생에 함께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익선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익선다다와 함께 F&B 공간을 운영했다. 동시에 서울의 스타트업 기업들이 떠날 때를 대비하여 소제동 곳곳을 매입했다. 현재 소제동에 위치한 많은 건물이 주식회사 관사마을의 소유로 F&B 매장부터 팝업, 전시 공간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풍류소제
이들의 행보는 경제적 수익이 아닌 공익에 그 우선순위가 있다. 실제로 공공성이 높은 프로그램들을 여러 진행했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아트벨트 프로젝트'다. 관사를 갤러리와 공연장으로 꾸리는 등 소제동의 다양한 공간들을 발굴하여 문화예술의 장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로 2020년부터 2021년까지 3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또한 보유하고 있는 일부 공간들은 대전 지역 청년의 창업 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 지역 대학인 우송대와 협력하여 외식조리학부 학생들을 F&B 매장에 직접 채용하는 등 지역 청년들의 정착에 힘쓰기도 했다.
"대전에서 도시계획을 30년 넘게 해왔지만 소제동은 몰랐어요. 서울 민간 기업들이 소제동에 내려왔고, 그때 가서 보니 정말 가치 있는 곳이더라고요. 소제동이 발굴된 건 어떻게 보면 그들의 성과죠.“ 정대표는 도시재생지원센터장을 하며 서울 민간 기업들을 보고 소위 '먹튀'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았단다.
정대표는 ”지역을 활성화하려면 그 지역만의 역량으로는 부족하고, 결국은 외부의 자본이 들어와야 하는 것 같다“며 서울의 자본과 어떻게 슬기롭게 상생할 것인가는 결국 공공의 역할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전은 그런 역할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 아쉽지만 대신 지역 기업인 관사마을이 자본을 투자하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막고, 소제동 을 계속해서 활성화할 수 있게 노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현재 소제동을 둘러싼 일대는 재개발에 들어갈 예정이다. 정 대표는 재개발 이후 빽빽한 빌딩숲이 들어설 대전의 원도심에 소제동이 허파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래된 주택과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 사이로 들려오는 이런저런 말소리와 풍경들. 오랜 시간 쌓여온 도시 역사의 현장도 마주할 수 있는 대전 만의 특별한 공간이 될 이곳이 기대된다.
옛 충청도지사관사
도시의 유산과 예술의 만남 '테미오래'
테미오래는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같은 시기에 지어진 충남도지사 관사촌이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어 당시 대전역을 중심으로 확장된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주변에 대전 신사, 육군 관사, 현 대전중·고, 현 대전여중이 있어 관사에 거주하는 관리들의 생활 편리성이 고려된 자리였다. 해방 이후에는 2012년까지 충남도지사와 고위급 공무원들의 관사로 사용되었으며, 일반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마을이었다.
'테미'는 이 동네의 오랜 지명으로 새 이름인 '테미오래'는 시민 공모를 통해 지어졌다. '테미'라는 지명과 골목에 대문을 마주하는 집이 몇 채 있는 마을을 뜻하는 ‘오래’라는 뜻이 합쳐진 순우리말이다. 또한 ‘테미로 오라’, ‘관사촌의 오랜 역사’라는 중의적인 의미도 담겨있다.
일반인들에게 낯설었던 이 마을은 새 이름과 함께 2019년 4월 공간과 건축, 전시로 대전의 근현대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재구성되어 시민 곁으로 다가왔다. 2022년부터 대전문화재단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충남도지사공관을 포함하여 10개의 관사가 각기 다른 콘텐츠로 채워져 있어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들을 진행한다.
테미오래
대전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49호로 지정된 옛 충남도지사관사는 실제 도지사가 살았던 공간을 재연하고 있으며, <6.25전쟁과 이승만 대통령, 옛 충청남도 관사촌에서의 5일간의 기록>이라는 상설 전시가 진행된다. 1호 관사는 기획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8월은 <테미체험관: 감각의 정원>이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2호 관사 테미놀이터는 어린이를 위한 전시관으로 우리나라의 놀이를 시대별로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옛 충청남도 관사촌이었을 시절의 관사 주택을 재현하고 있는 5호 관사 '테미메모리', 방문객 쉼터 공간인 7호 관사 '테미살롱'도 함께다.
오래된 도시의 유산에 풍부하고 알찬 콘텐츠가 더해지니 테미오래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에 더해 나머지 관사들은 지역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었다. 6호관사인 테미갤러리는 무료로 전시 공간을 대관해주는 공간으로, 추윤경 개인전 <삶의 빛, 민화의 선율>을 볼 수 있었다. 직접 들어가 볼 수는 없었으나 8호와 10호관사는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의 레지던시 작가들의 작업실로 쓰이고 있다.
모두가 하나되는 마을 '어궁동 안녕마을'
충남대와 카이스트 사이의 ‘어궁동’은 어은동에서 궁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연구원과 대학생들이 모여있었지만, 인근에 새로운 상권이 개발되자 애매한 동네가 되었다. 2010년부터 지역의 활동가들이 이곳에 모여 '벌집'이라는 커뮤니티 공간을 만든 것이 어궁동 활성화의 시작이다. 이후 벌집의 청년들은 어궁동 거리에 창업을 하는 한편 주민들과 함께 축제와 운동회 등을 운영하며 동네 사람들과 신뢰를 쌓아갔다.
2017년, 벌집의 멤버들이 본격적으로 어궁동에서 사업을 시작하며 '윙윙'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같은 해 커뮤니티 카페를 열었으며, 다음 해에 어궁동에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시작되었다. 어궁동에는 '안녕마을'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이어 거점 공간인 '안녕센터'가 만들어지고 다양한 공동체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이번 기행의 점심 식사는 윙윙 건물 1층의 한식집 '사랑담은'이었다. 주방 안쪽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던 김효임 사장에게는 사실 특별한 '부캐'가 있었다. 그는 '안녕마을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으로 안녕센터의 운영과 마을 주민들의 커뮤니티를 이끌고 있다.
안녕센터
도시재생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과제가 거점 공간의 활성화다. 사업비를 받아 하드웨어적인 건물을 지은 후, 사업 기간이 끝난 후 방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녕마을의 경우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공간이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 특히 아이부터 노인까지 어궁동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열려있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1층의 '별별통통'은 청소년들로 매일 차있다. 제공되는 보드게임과 책들을 즐기며 쉬어가기도 하고, 자율적으로 동아리를 구성하여 여러 활동을 한다. 커뮤니티 공간에서는 문화 강좌가 열리는데 특히 키오스크와 스마트폰 강좌 등 중장년층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인기가 좋다. 2층에는 대전의 청년들을 위한 공간이 있다. 쉐어하우스와 공유오피스를 보증금 350만 원에 월세 30만 원 정도에 이용할 수 있다.
이곳을 단순히 이용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받은 만큼 마을을 위해 베풀어야 하는 것이 안녕마을의 대원칙이다. 때문에 김효임 이사장은 길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줍깅' 등 작은 일부터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안녕축제' 또한 마찬가지다. 안녕축제는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지역의 사람, 공동체, 상점을 소개하고 정답게 문화를 나누는 이들만의 축제다. 그 뒤편에는 사소한 잡일부터 플리마켓 운영까지 주민들의 직접적인 노력이 있다.
"외부에서 도시재생 지역의 마을 분들이 견학을 오시면 제일 먼저 묻는 게 있어요. '좋아 보이는' 마을을 만들고 싶은지, '좋아하는' 마을을 만들고 싶은지요. 차이가 뭐냐면, 좋아하는 것은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있는 거예요. 우리 마을을 위해 수고할 마음은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좋아하길 바라면 안 되겠죠."
한 마을의 도시재생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중간 지원 조직, 지자체, 활동가, 특히 마을 주민들까지. 안녕마을은 김 이사장을 필두로 주민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으며, 청년 기업과 유성구청까지 뜻을 함께하고 있다. 도시재생에 성공한 대표 사례로 안녕마을이 꼽히는 이유를 이곳을 답사하며 알게 됐다.
나선지대
지속가능한 마을을 위한 여정 '재작소'
어궁동에는 다양한 청년 로컬 기업들이 모여있다. 그중 하나인 '재작소'(再作所)를 만나기 위해 유성천을 따라 걸었다. '나선지대'라고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여니 여러 제로 웨이스트 제품들과 생태 관련 책들이 반겨주었다. 재작소는 '지속 가능한 삶'을 추구하는 브랜드로, 나선지대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을 진행하고 대안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거점이다. 이곳에서 지구를 덜 아프게 하는 제품을 선보이는 제로 웨이스트 가게 '은영상점', 생태적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책들을 제안하는 책방 '버들서점' 등을 운영한다.
은영상점과 버들서점의 옆으로는 '메이커스페이스'가 있다. 생활에 필요한 제조 기술을 직접 배워 사람들이 일상에서 쓸 수 있게 하는 '자가 수리 문화'를 퍼뜨리고 있는 공간이다. 일명 '기술의 민주화'라고도 부르는 문화다. 한 환경운동가는 일상 속에서 가장 쉽게 환경 보호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그저 '물건 안 사기'라고 말했다. 생산과 운반의 과정에서 낭비되는 에너지가 많기 때문이다. 메이커스페이스에서는 전자제품부터 옷까지, 어떤 물건이 망가졌을 때 고민 없이 쉽게 버리는 것보다는 천천히 탐구하며 고쳐나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재작소는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문화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지역 공동체 활동도 함께 하고 있다. 마당 도시기행이 찾았던 주말에도 환경 워크샵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곳에서는 지역 시민들과 함께 플라스틱 자원순환 활동을 진행하는 '프레셔스 플라스틱 대전', 물건을 함께 수리·수선하며 과생산과 과소비에서 벗어나는 활동을 하는 '새로고침 클럽' 등의 활동을 한다. 2022년부터는 메이킹(making) 활동과 함께 영상 제작 활동을 중심으로 '청년마을 여기랑'을 운영하며 청년의 자립을 돕고 청년과 마을을 잇고 있다.
글 류나윤 기자 ㅣ 사진 김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