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회 마당기행ㅣ다시 역사기행 ① 고령 합천   2026.5월호

고분에서 대장경까지, 이어진 역사유산의 길


지산동 가야고분군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를 묻게 된다. 역사와 문화, 도시를 주제로 길 위의 사유를 이어온 마당 기행이 올해 다시 역사기행을 시작했다. 한반도의 시간 위에 남겨진 유산을 찾아 단순히 과거를 학습하는 것을 넘어 오늘의 우리를 성찰하는 여정이다. 이 땅의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으며 우리는 무엇을 이어갈 것인가.


지난 3월 28일 조법종 교수와 함께 다시 역사기행의 첫발을 뗐다. 여정의 목적지는 고령의 암각화와 가야고분군 그리고 합천 해인사다. 가야산과 낙동강 유역을 터전 삼아 독자적인 문화를 일궈온 옛 사람들의 흔적을 쫓았다.





땅 위로 드러난 왕국의 기억 

학창 시절을 생각해보면 역사는 대개 삼국을 중심으로 흘렀고, 가야는 그 주변부의 기록으로 소외되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23년 9월 전국 7개의 가야고분군이 국내 16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부터다. 무덤 밖으로 드러난 왕국의 기억은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입증하는 소중한 증거가 되었다.


이번 기행의 중심지인 고령은 대가야의 찬란한 거점이었다. 건국부터 562년 신라에 병합되기까지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땅에는 하나의 왕국이 숨 쉬고 있었다. 완만한 능선을 그리며 솟아오른 고분들은 말없이 오래된 이야기를 건넸다.



장기리 암각화



장기리암각화ㅣ바위에 새겨진 신의 존재

고령지역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였다.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고인돌과 선돌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 암각화도 다수 제작되었는데, 고령은 현재 국내에서 암각화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꼽힌다.


지산고분군으로 향하기 전, 장기리암각화를 먼저 찾았다. 1971년에 발견된 이곳은 당시 주민들의 농경 의식이나 제사가 이루어지던 신성한 장소로 추정된다. 바위에는 추상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해가 떠오르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고 신의 형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기록 수단이 없던 시대, 바위에 흔적을 남기는 행위는 곧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공동체의 기억을 남기고, 자신을 상징화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었던 셈이다. 초기 수렵민이 남긴 암각화는 비교적 사실적이다. 동물과 인간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무엇을 그렸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표현은 점차 추상화되어 장기리암각화와 비슷한 형상을 보인다. 구체적인 이미지 대신 상징이 중심이 되고, 동심원과 같은 반복 문양이 두드러진다. 


흥미로운 점은 일부 암각화에서 훼손의 흔적이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이를 이후 유입된 철기 세력이 토착 청동기 집단의 신성 공간을 의도적으로 파괴한 결과로 해석한다. 실제로 가야 고분군의 석재 일부에서 암각화와 같은 문양이 확인되기도 한다. 이전 세력의 제단을 무덤에 가져다 쓴 것이다. 단순히 훼손한 것이 아니라, 이곳의 신성함을 짓밟고 너희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선언하려 한 철기 세력의 잔인한 의지였을지도 모르겠다. 




음식물이 담겨있던 토기

대가야왕릉전시관



고령 지산고분군ㅣ죽음 이후를 믿었던 사람들의 무덤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이 질문은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되어 온 가장 오래된 물음 중 하나다. 고대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사'에 가까웠던 것 같다. 지금의 삶에서 저편의 세계로 옮겨가는 일. 그래서 그들은 죽은 뒤에도 삶이 이어진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대형 고분과 순장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특히 가야에서 이러한 순장 풍습이 대형 고분 문화와 함께 두드러진다. 가야에는 멸망할 때까지 780여 개소, 수십만 기에 이르는 고분이 존재했던 것으로 조사된다. 그 규모만으로도 이들이 죽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령 지산고분군은 고분군 중 최대 규모로, 700여 기의 봉분이 자리하고 있다. 능선에는 수십 기의 거대한 대형 고분이, 경사면에는 수백 기의 중소형 고분이 이어진다. 직접 올라서니 그 숫자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봉분이 줄지어 이어지는 능선은 조용하고 묵직하다.


고분군 인근의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는 44호분 내부를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해두었다. 순장 인원만 약 40명에 이르는 대형 무덤이다. 무덤 안에는 피장자와 순장자들이 함께 묻혀 있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는 무사가 정자세로 놓이고, 시종들은 비교적 흩어진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신분에 따른 위계가 죽음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사후세계에서도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기에 부인과 첩, 호위무사와 시종까지 함께 데려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껴묻거리로 들어간 토기에서는 음식물이 담겼던 흔적도 확인된다. 그곳에서도 먹고, 생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순장된 사람들의 마음을 온전히 짐작하기는 어렵다. 다만 일부 순장자의 유골에서는 도망치다 공격당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사람이라기보다 부장품처럼 취급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44호분 외에 45호분에서도 약 10명이 순장된 것으로 확인된다. 어쩐지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야광조개국자



이러한 대형 무덤 문화는 불교가 들어오면서 크게 달라진다. 죽음 이후의 사후세계를 믿기 보다는, 이승에서의 선행과 믿음이 죽음 이후의 자리를 결정한다는 생각으로 옮겨간 것이다. 거대한 고분 대신 사찰이 중심 공간으로 자리 잡았고, 신라에서는 지증왕 때 순장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가야 역시 6세기 신라에 복속된 이후 순장은 사라진다.


지산고분군은 일제강점기부터 수없는 도굴과 훼손을 겪어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일제는 이 지역 발굴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그 흐름을 뒷받침할 만한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발굴은 했지만 기록은 제대로 남기지 않았고, 유적은 한동안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본격적인 발굴과 조사는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남은 유물들은 적지 않은 것을 말해준다. 금동관, 청동그릇 등은 당시 대가야의 공예 수준을 짐작하게 하고, 특히 오키나와가 원산지인 야광조개국자는 대가야의 원거리 교역 활동을 보여준다. 



합천 해인사ㅣ진실한 눈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다 

해인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절집은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해인이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어 '바다 해(海)'와 '도장 인(印)'을 쓴다. 해인이란 파도가 없는 고요한 바다에 우주 만물이 어떤 왜곡도 없이 도장처럼 그대로 비치는 경지를 말한다. 즉 모든 번뇌가 멈추고 진실한 눈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일주문으로 들어서기 전 당간지주에는 '나무아미타불'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불경의 가르침을 다 알지 못해도, 이 여섯 글자를 외우며 당간지주를 한 바퀴 돌면 부처의 가르침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대중의 눈높이에서 진리에 가닿으려 했던 오랜 노력의 흔적들이다.



해인사 장경판전



경내로 들어가기 전 왼쪽의 국사단이 눈에 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여성을 모시는 것이 불경하다는 이유로 산신의 모습이 남성으로 바뀐 적도 있었다고 하나, 이후 다시 여성으로 돌아왔다. 정견모주는 하늘의 신 이비가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이진아시왕은 대가야국을, 작은아들 수로왕은 금관가야국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사찰 안에 가야의 신화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다.


사천왕문을 지나 들어서면 '해인도'가 있다. 신라 의상대사가 화엄경의 가르침을 도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불교의 만(卍)자를 본뜬 모양이다. 합장하고 한 바퀴 천천히 돌면 팔만대장경의 진리와 함께한다고 전해진다. 글로 읽는 경전이 아니라 걸음으로 이해하는 경전인 셈이다. 어렵고 먼 가르침을 걷는 행위 하나로 풀어낸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해인사의 주 법당은 대웅전이 아닌 대적광전이다. 화엄경 중심 사찰이기 때문에 석가모니불 대신 화엄세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 이날 눈길이 머문 것은 천장에 그려진 주악비천도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이 비파와 소고, 피리 등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섬세하게 담겨 있다. 한국의 오랜 소리 문화를 전하는 귀한 그림이다.


한편에는 키오스크 형식으로 된 디지털 불전함이 눈에 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방문객의 편의를 생각한 모습이다. 이러한 변화가 자칫 속세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종교의 본래 의미와 어떻게 공존해 나갈지는 앞으로 고민해볼 지점일 것 같다.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ㅣ나라를 구하기 위한 그들의 염원  

해인사는 불교의 세 보물인 부처(불), 가르침(법), 승려(승)를 상징하는 삼보사찰 중 하나로 꼽힌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통도사가 불보사찰, 고승을 배출한 송광사가 승보사찰이라면, 해인사는 부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팔만대장경을 모시고 있어 법보사찰이다.


해인사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팔만대장경을 만날 수 있다. 이름이 주는 무게와는 달리 생각보다 소박한 모습이다. 판전으로서의 기능만 충족시켰을 뿐 외형의 장식이 없다. 내부로 직접 들어갈 수는 없지만, 나무 창살 사이로 보이는 목판들은 그것만으로도 묵직한 장엄함을 전한다. 


부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기록되지는 않았다. 열반 이후 제자들은 이를 보존할 필요를 느꼈고, 다라수 잎에 글자를 새긴 패엽경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기록의 전통은 중국을 거쳐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는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불교의 힘에 기대었다. 거란의 침입 때 초조대장경을 만들었고, 몽골의 침입으로 그것이 불타 사라지자 다시 대장경을 새기기로 한다.


1237년부터 시작된 재조대장경, 팔만대장경의 판각에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들었다. 준비 기간까지 합치면 16년. 그 긴 시간 동안 귀족부터 평민, 부녀자까지 수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그렇게 완성된 경판은 8만여 장, 5천만 자가 넘는다. 놀라운 점은 그 모든 글자가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일정하다는 것이다. 재작년에 약 1년간 완판본문화관에서 전통 판각을 배웠었다. 직접 해보니 밑그림을 따라 동그라미 하나를 새기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그 시대에 이만한 양을 이토록 정교하고 균일하게 판각해냈다는 사실이 새삼 크게 다가온다. 지금도 이 전통을 잇기 위한 각수 양성이 이어지고 있다. 


그 귀한 경판들이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이유는 장경판전의 구조에 있다. 건물은 해인사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사계절 내내 햇빛이 들고, 크기를 달리한 창들이 마주 보며 자연스럽게 공기를 순환시킨다. 바닥에는 소금과 숯, 황토를 겹겹이 다져 습도를 조절한다. 인위적인 장치 없이도 벌레와 곰팡이를 막아내는, 섬세하게 계산된 공간이다.


화마도 피해간 팔만대장경에 위기가 한 번 있었던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가야산 일대에 숨어든 공비를 소탕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인사에 폭격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편대장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대장경판이 파괴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그 선택으로 해인사는 전쟁의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 해인사는 이후 김영환 대령의 공적비를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팔만대장경은 국가적 위기 때마다 이를 지켜내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의 의지가 모여 만들어진 문화유산이다. 또한 불교의 진리를 집대성한 도서관이자 인쇄소였으며 서민들의 염원이 깃든 신앙의 공간이었다.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이 각각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은 단순히 그 유산이 오래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