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도시를 읽는 방법  2024.9월호

흑백의 그림과 말풍선에 담긴 ‘지역의 사생활’

: 독립만화출판사 삐약삐약북스 대표 전정미


전정미 작가



군산의 한 작은 출판사. 이곳에서는 만화책 한 권으로 도시를 읽어내는 색다른 시도를 했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만화출판 프로젝트 <지역의 사생활 99>이다. 저마다 다른 그림체, 다른 저자의 이름이 적힌 책 표지에는 전주와 군산을 비롯해 부산, 경주, 속초 등 전국팔도의 다양한 지역들이 큼직하게 박혀있다. 지역 한 곳 한 곳의 이름을 내건 만화책이라니, 내가 사는 도시를 찾아 펼쳐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세상에 없던 지역 만화책 탄생기 

이 특별한 시리즈는 2019년 군산에 문을 연 독립만화출판사 삐약삐약북스에서 탄생했다. 이곳의 공동대표인 전정미, 김영석 부부는 ‘불친’과 ‘불키드’라는 필명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역 만화가이기도 하다. 소박한 크기지만 정면에 너른 바다가 보이는 작업실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린다. ‘지역의 사생활 99’는 2020년 시즌1을 처음 선보인 후 어느새 시즌4를 준비 중에 있다. 이들은 거창한 계기를 갖고 무언가를 기획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읽고 싶은 만화를 떠올리고, 그것이 세상에 없다면 우리가 만들자는 생각으로 뛰어든다고 전한다. 


“어딘가 여행을 가면 지역을 소개하는 책들을 한쪽 코너에 모아 소개하잖아요. 거기에 글이나 사진으로 만들어진 책들은 있는데 만화책은 없는 거예요. 있다고 해도 홍보성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렇다면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재밌는’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보면 어떨까하는 마음에 기획을 하게 됐어요.”




지역의 사생활 99 시즌1




세 개의 시즌을 지나며, 27곳의 이야기가 27권의 만화책으로 만들어졌다. 일일이 작가들을 섭외해 그들이 그리고 싶은 지역을 정하고 이야기를 맡겼다. 그 지역의 유명한 장소나 먹을거리 등이 등장해야한다는 원칙만 정해놓고 나머지는 작가의 몫으로 두었다. 누군가는 아주 일상의 이야기를, 누군가는 무거운 역사를 다루기도 했다. 부부도 이번 프로젝트의 기획자이자 작가로서 지역 하나씩을 맡았다. 전정미 작가는 군산 편 『해망굴 도깨비』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군산의 어두운 역사를 하나의 스토리로 엮었다. 


“원래는 로맨스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군산에서 활동하시는 조종안 기자님의 강연을 듣게 됐어요. 그때 군산 대명동과 개복동 화재 참사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죠. 이 사건으로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에요. 내가 군산을 대표해 무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면 과연 이대로 괜찮을까? 고민을 했죠. 결국 마감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작업했던 콘티를 전부 갈아엎었어요.” 


처음부터 다시 써내려간 이야기는 약속한 기한을 넘기며 무려 5개월이 더 걸렸다. 프로젝트를 응원하는 후원자들에게 사과를 거듭하며 우여곡절 끝에 군산 편을 완성했다. 그는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없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이 이야기를 그렸다고 전한다. 



 김영석, 전정미 부부의 작업실




다정한 마음이 그려진 페이지들 

책을 펼치면 만화 외에도 재미난 페이지들을 만나게 된다. 첫 장에는 그 지역의 교통과 인구, 역사부터 대표적인 여행지를 간략히 소개하며, 특별히 응급실 정보를 안내하고 있다. 이는 부부가 군산에 오게 된 비하인드와 연결된다. 충북 단양에 살던 두 사람은 그곳에서 자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며 지역에 소아과나 응급실 등 의료 환경이 부족함을 실감했다. 결국 시댁이 있는 군산으로 거처를 옮기며 올해로 10년차 ‘군산 사람’이 된 것이다. 당시 작은 도시에서 겪었던 어려움들을 떠올리며, 다정한 마음을 담은 페이지를 책의 첫 머리에 끼워 넣었다. 


이외에도 휠체어나 유모차 등 바퀴로 갈 수 있는 명소를 소개하고, 만화 속 주인공의 이동 경로를 따라 여행할 수 있는 지도가 정리되어있다. 일반적인 여행책과 견줄만한, 참으로 알찬 구성이다. 도시를 세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나누고자하는 부부의 마음이 페이지마다 묻어난다. 에필로그에는 각 작가의 인터뷰도 담았다. 그들의 작업 과정과 지역을 바라보는 시각, 개인의 이야기 등을 전하며 전국의 숨어있는 만화가들을 알리는 역할을 해냈다. 


99번째 시리즈 완결을 꿈꾸며 

지역 시리즈를 시작으로, 삐약삐약북스의 프로젝트는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지금은 ‘음악의 사생활 99’, ‘대운동회’ 등 새로운 프로젝트들로 하루하루가 바쁘다. ‘음악의 사생활 99’는 거대 엔터 산업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음악계에서 묵묵히 자신의 음악을 이어가는 뮤지션들을 조명한다. ‘대운동회’ 시리즈에서는 학교 안과 밖의 청소년을 위한 열두 편의 단편 만화집을 제작하고 나선다. 주제는 모두 다르지만, 삶의 한쪽에 비켜있는 사람들, 소외된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이 하나의 공통점으로 다가온다. 이들의 목표는 ‘지역의 사생활 99’라는 제목처럼, 언젠가 99권의 시리즈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한다. 완결이 쉽지 않은 장기 프로젝트가 되겠지만, 99번째 만화책을 펼쳐보는 날을 기대하며 응원을 보내고 싶다. 




고다인 기자